Life

너에게 발칙한 유럽을 보낸다

 올 컬러판 여행서적 두세 권을 독파, 충분히 정보를 장전하고 여행을 떠난다. 예정된 루트를 따라 착착 진행된 여행에 예외가 없고, 특별할 일도 없다. 동공 렌즈로 바라본 건물과 풍경 또한 큰 감흥이 없다. 모든 원흉을 여행책에 돌린다. '다음 여행은 정보 아닌 여유로 무장하고 새로운 장소가 주는 불확실성과 예측 불가함을 온몸으로 느끼리.' 후회섞인 여행 후 책 한 권을 만났다.

 

모두가 원했지만, 쉽게 찾을 수 없던 여행서 <빌브라이슨 발칙한 유럽산책>

IMG_8934빌 브라이슨의 여행은 대단할 게 없다. 이 도시에서 저 도시로 옮기고, 하루 일과를 마치면 숙소에 도착해 뜨거운 물로 샤워하고 잠자리에 드는 평범한 여행. 하지만 이런 별 것 없는 하루가 빌 브라이슨의 시선을 통과하면 새롭게 채색된다. '시원하도록 도발적'이라는 둥, '옷에 난 보푸라기에 대해 글을 써도 폭소를 자아낼' 거라는 둥, 빌 브라이슨은 언론에서 흔히 극찬을 받는 작가다. 이런 글쟁이가 중세의 찬란한 영광을 잘 보존해 온 아름다운 유럽대륙을 여행하고 어떻게 풀어냈을지 기대되지 않는가?

우선 책 읽을 장소를 정해야 한다. 내 몸은 비록 한반도에 있지만 영혼만은 유럽 어느 오래된 도시로 보내줄 곳을 찾았다. 향한 곳은 회사 근처 호텔과 도서문화공간이 조화된 파주출판단지의 아이콘, '지지향'이다. 높은 천장과 넓은 내부, 책장 가득 꽂힌 책들을 배경으로 편안하게 기댈 수 있는 소파와 의자들이 있는 곳. 공간에 들어서자마자 정서적 포만감이 느껴진다. 난 이곳에 편안하게 앉아 책장을 넘기고, 해박한 미국인 저널리스트 빌이 네달간의 여행기를 떠들 예정이다. 그는 각 도시에서 경험하고 느낀 바를 역사, 정보와 절묘하게 혼합하고, 자신의 명석하고 유머러스한 면모를 더해 노골적이고 속 시원한 문체로 풀어낸다.

왜 음습한 터널이나 높은 육교를 통해야만 복잡한 거리를 다닐 수 있어야 하는가? 왜 사람보다 자동차를 우선 고려하는가? 인간은 그토록 돈이 많으면서도 왜 그리 바보인가? 이 모두는 우리 시대의 저주다. 우리는 돈이 너무 많고, 생각은 너무 없다. 그런 의미에서 퐁피두센터는 합성수지로 만든 ‘부유하고 우매한 인간상’의 상징이다.

유럽 어디를 가더라도 1960~70년대의 건축물을 보면 당신의 건설업체와 건축가들이 대체 얼마나 몹쓸 정신병을 앓았기에 아름다운 유럽을 이 꼴로 만들어놨는가 하는 의문을 갖게 된다. 그러나 그 정도가 브뤼셀만큼 심한 곳도 없다.

…폭소와 공감을 연발하는 구절이 책 한 권 내내 이어진다.

하지만 그가 매사를 냉소적으로 바라본 것은 아니다. 찬양과 감상을 아끼지 않거나 흥미를 느낀 도시도 적지 않다. 너무 아름다워 섬뜩하기까지 했던 함메르페스트의 오로라,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세밀히 관찰한 암스테르담 홍등가, ‘보기 좋게, 절망적으로 영원히 사랑에 빠졌다는 걸 깨달았다’ 고백한 카프리 풍광은 서정적이며 낭만적이라 직접 책을 넘기며 만나봐야 한다.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성희롱과 인종차별 섞인 막말이 넘치는 이 책이, 망나니처럼 멋대로 살고 싶은 충동이 가득한 날 내 갈망을 시원하게 해결해 준다. 감성 충만한 날 다시 꺼내 읽으면 날 웃겨 죽이려는 남자친구가 여행지에서 매일매일 전화 너머로 들려주는 이야기가 된다. 독자에게 유럽에 관한 그 어떤 환상을 주지 않으면서 결국 유럽으로 이끌 책, 정보가 아닌 그곳의 공기와 감성을 전해주고, 마침내 유럽을 찾았을 때 놀라움과 기쁨이 증폭될 책, <빌브라이슨 발칙한 유럽산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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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속에서

heart p.53/ 유럽인들은 하나 같이 너무나 비슷하다. 모두 책을 좋아하고 지적이며, 소형차를 몰고, 오래된 마을의 작은 집에서 살며, 축구를 좋아하고, 상대적으로 덜 물질주의적이며, 법을 준수하고, 호텔 방은 춥게 하면서 음식점이나 술집은 따뜻하고 편안하게 만들지 않는가. 유럽에서는 아무것도 확신할 수 없다는 점이 나는 상당히 마음에 들었다.

heart p.167/ 상쾌한 봄날 저녁 서서히 저물어가는 저녁 해의 긴 그림자를 따라 외국 도시의 낯선 거리를 한가하게 산책하는 일만큼 즐거운 일이 있을까? (중략) 앞으로 오랫동안 흐뭇하게 기억할 유쾌하고 내 집 같은 음식점이 과연 길 이쪽에 있을지 저쪽에 있을지 망설이는 일은 또 어떤가? 나는 이런 일이 너무도 즐겁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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